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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잿빛 하늘 아래에서

아량아량드롱 2026. 3. 21.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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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I. 붕괴 

  • 제1장: 그날, 하늘이 불타던 날
  • 제2장: 7분의 침묵
  • 제3장: 도시의 마지막 밤
  • 제4장: 살아남은 자들
  • 제5장: 방사능 비

PART II. 생존 

  • 제6장: 물의 전쟁
  • 제7장: 인간의 본성
  • 제8장: 약탈자들
  • 제9장: 붕괴된 도덕
  • 제10장: 희망이라는 환상

PART III. 절망 

  • 제11장: 죽음보다 긴 하루
  • 제12장: 아이들의 세계
  • 제13장: 돌연변이
  • 제14장: 기억의 붕괴
  • 제15장: 인간인가, 짐승인가

PART IV. 선택 

  • 제16장: 마지막 공동체
  • 제17장: 새로운 질서
  • 제18장: 희생
  • 제19장: 불씨
  • 제20장: 다시, 인간으로

 

 

📖 제1장: 그날, 하늘이 불타던 날

서울의 아침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출근길 지하철은 숨 막힐 듯 붐볐고, 사람들은 각자의 스마트폰 속 세계에 파묻혀 있었다.
뉴스 속보가 한 줄 스쳐 지나갔다.

“긴급—북반구 다수 국가 간 군사 긴장 고조…”

하지만 아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세상은 늘 그런 식으로 불안했고, 또 아무 일 없이 지나가곤 했으니까.


오전 9시 17분.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나기 시작했다.

하늘이 번쩍였다.

번개가 아니었다.
태양이 하나 더 떠오른 것처럼,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빛이었다.

그리고—

“쾅.”

소리가 아니라, 세상이 찢어지는 감각이었다.

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졌고, 건물들이 종잇장처럼 흔들렸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 비명조차 폭발의 충격파에 묻혀버렸다.


지하철 안.

민재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뭐야… 이게 뭐야…?”

전등이 깜빡이다 꺼졌다.
완전한 어둠.

사람들의 숨소리, 울음, 비명.

“핵이야… 핵 공격이야…!”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은 곧 전염병처럼 퍼졌다.

핵.
그 단어 하나로, 모든 이성은 무너졌다.


지상.

서울의 절반이 사라지고 있었다.

거대한 버섯구름이 도시 위로 피어올랐다.
회색이 아니라, 검붉은 색이었다.

그건 구름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민재는 가까스로 지하철 출구를 향해 기어올라갔다.

계단 위로 올라갈수록 공기가 이상했다.

타는 냄새.

살이 타는 냄새였다.


출구를 나서는 순간—

그는 멈춰 섰다.

세상은 이미 끝나 있었다.

건물은 무너져 있었고, 거리에는 사람의 형체였던 것들이 널려 있었다.
어떤 이들은 아직 살아 있었지만, 그게 더 끔찍했다.

피부가 녹아내린 채로
살아 있었다.

“도와… 줘…”

누군가 손을 뻗었다.

민재는 그 손을 잡지 못했다.

잡는 순간,
자신도 끝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늘에서는 검은 재가 내리고 있었다.

눈처럼, 조용히.

하지만 그건 눈이 아니었다.

방사능 낙진.

보이지 않는 죽음이
천천히, 확실하게
모든 것을 덮고 있었다.


그날,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다움은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민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은 여전히 떠 있었지만,
그 빛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차갑고,
잔인했다.


그는 속삭였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그 질문에 답해줄 세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 제2장: 7분의 침묵


폭발 이후, 정확히 7분.

그 시간 동안
세상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민재는 그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귀가 멀어버린 줄 알았다.

입을 벌려 소리를 질러도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무음.

완전한 침묵.


그는 비틀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입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건 차라리 더 끔찍했다.


“……”

민재는 입을 벌렸다.

“살려줘…”

자신이 분명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7분.

나중에 생존자들은 그 시간을 그렇게 불렀다.

“침묵의 시간”

핵폭발의 충격파와 전자기 펄스,
그리고 일시적인 청각 마비가 만들어낸
지옥 같은 공백.


그 침묵이 끝났을 때—

세상은 다시 소리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알던 소리가 아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

끝없는 비명.


“불이야! 불이야!!”

“도와줘!!!”

“내 아이가… 내 아이가…!”


소리는 한꺼번에 쏟아졌다.

마치 누군가가 세상의 볼륨을
최대로 올려버린 것처럼.


민재는 귀를 막았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 소리는 밖에서 들리는 게 아니라,
머릿속을 찢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는 무너진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 파편이 바닥에 깔려 있었고,
냉장고는 넘어져 있었다.

하지만—

물.

생수가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병을 집었다.

뚜껑을 따다가 손이 미끄러졌다.

그 순간, 옆에서 누군가가 그를 밀쳤다.

“내 거야!!”


민재는 넘어졌다.

그를 밀친 남자는 눈이 뒤집혀 있었다.

이미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비켜! 다 죽을 거야!!”

그 남자는 물병을 몇 개나 품에 안고
미친 듯이 뛰쳐나갔다.


민재는 바닥에 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질서는 이미 끝났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진열대를 뒤집고,
남아 있는 물과 통조림을 쓸어 담았다.


그의 손이 떨렸다.

“이건… 도둑질이야…”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밖에서 들려온 비명.

그리고 총성.


탕.

탕.

탕.


누군가 이미 총을 들고 있었다.


민재는 멈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 법도 없네…”


그 순간—

멀리서 또 하나의 섬광이 터졌다.


두 번째 폭발.


이번에는 더 가까웠다.

충격파가 다시 도시를 덮쳤다.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지면을 타고 전해졌다.


민재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유리 조각이 다시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이건 단 한 번의 전쟁이 아니었다.


연속된 멸망.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끝이 아니야…”


그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하늘 위로,
여러 개의 검은 점이 지나가고 있었다.


미사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날—

인류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죽고 있었다.


민재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없었다.

희망도 없었다.


하지만—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 순간,
그의 시야 한쪽에 작은 움직임이 들어왔다.


잔해 더미 아래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민재는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 선택이

그의 인생을,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이야기를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는 걸—

그는 아직 몰랐다.

 

 

 

📖 제3장: 도시의 마지막 밤


해는 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노을은
아름답지 않았다.


하늘은 붉은색이 아니라
검은색에 가까웠다.

연기와 재가 태양을 삼켜버린 탓이었다.


민재는 잔해 더미 앞에 서 있었다.

조금 전 본 그 손.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다.


“살려… 줘…”

희미한 목소리였다.


민재는 무릎을 꿇었다.

콘크리트와 철근이 뒤엉켜 있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치울 수 없는 무게.


“잠깐만… 기다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도울 사람은 없었다.

아니—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바빴다.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이는 시체에서 물건을 빼앗고 있었고,
어떤 이는 불타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민재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맨손으로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피가 났다.

손바닥이 찢어졌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아니—

몇 시간 같았다.


마침내
사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였다.

20대 중반쯤.

얼굴은 재로 뒤덮여 있었고,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아요?”

민재가 물었다.


여자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다리를 보자마자
민재는 알았다.


비정상적인 각도.

골절이었다.


“일어날 수 있어요?”


“…못… 움직여요…”


민재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부상자를 데리고 다닌다는 건—


자살과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싸웠다.


“버려. 너도 죽는다.”

“도와. 아직 인간이라면.”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내가… 데리고 갈게요.”


여자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왜…”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도 이유를 몰랐으니까.


그는 여자를 업었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더 슬펐다.


밤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도시는 어둠에 잠겼다.

하지만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곳곳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타닥—

타닥—


불타는 소리.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


비명.


“도와줘!!!”

“살려줘!!!”


그 소리는 밤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줄어들었다.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민재는 무너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곳.


“여기서… 잠깐 쉬어요.”


여자를 내려놓았다.


“이름이 뭐예요?”

그가 물었다.


“…수진이에요…”


“나는 민재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끝났다는 걸.


수진이 입을 열었다.


“가족은…?”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저었다.


수진도 더 묻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


여러 명.


민재의 몸이 굳었다.


“쉿…”


그는 수진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여기야. 안에 불빛 있었어.”


남자들의 목소리.


민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놈들이다.”


그 말은—


희망이 아니라
위협이었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세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손에는—


칼.

그리고 쇠파이프.


그들의 눈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오…”

그중 한 명이 웃었다.


“둘이나 있네?”


민재는 천천히 일어섰다.


몸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뒤에는—


수진이 있었다.


“우린… 그냥 지나갈게요…”

민재가 말했다.


남자들이 웃었다.


“지나가?”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몰라?”


그들은 천천히 다가왔다.


“가진 거 다 내놔.”


민재는 가방을 움켜쥐었다.

물과 음식.


이건—

생명줄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안 돼.”


그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뭐?”


민재는 물러서지 않았다.


“안 준다고 했어요.”


그건—

선택이었다.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짐승이 될 것인가.


남자가 쇠파이프를 들어 올렸다.


“그럼 죽어.”


그 순간—


밤은 더 이상
단순한 밤이 아니었다.


그건—


인간이 인간을 시험하는
지옥의 시작이었다.

 

 

 

 

📖 제4장: 살아남은 자들


쇠파이프가 공기를 가르며 내려왔다.


퍽.


민재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어깨에 충격이 꽂혔다.


“큭…!”


뼈가 부러진 건 아니었지만,
팔 전체가 저릿하게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다시 쇠파이프를 들어 올렸다.


“버티네?”


두 번째 공격은 더 빨랐다.


하지만—


“그만해!!!”


수진의 비명이 공간을 찢었다.


남자들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그 찰나.


민재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유리 조각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하아아아!!”


있는 힘을 다해 휘둘렀다.


“악!!”


유리가 남자의 팔을 깊게 베었다.

피가 튀었다.


남자는 비틀거렸다.


“이 새끼가!!!”


나머지 두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 순간—


민재는 도망쳤다.


싸우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뛰어요!!”


그는 수진을 다시 업었다.


몸이 비명을 질렀다.

어깨는 이미 한계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뒤에서 욕설과 발소리가 쫓아왔다.


“잡아!!!”


어둠 속을 미친 듯이 달렸다.


불타는 건물 사이를 지나고,
무너진 도로를 넘어갔다.


숨이 찢어질 것 같았다.


“헉… 헉…”


폐가 타들어 가는 느낌.


하지만—


살아야 했다.



한참을 달린 뒤.


민재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무너진 지하 주차장 입구.


그는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숨을 죽였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갔나…”


완전히 조용해졌을 때,
민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수진도 아무 말이 없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침묵은—


살아남았다는 증거였다.



“왜…”


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도망쳤어요?”


민재는 고개를 숙였다.


“이길 수 없으니까…”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건 싸움이 아니라… 사냥이에요.”


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약자는—


먹잇감이라는 걸.



지하 주차장은 어둡고 차가웠다.


차 몇 대가 뒤집혀 있었고,
곳곳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있었다.


“……”


여섯 명.


모두 그들을 보고 있었다.


민재의 몸이 굳었다.


또 다른 위협.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들 중 한 명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무기 없어요.”


그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도… 도망친 사람들이에요.”


민재는 쉽게 믿지 않았다.


“증명해요.”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증명할 게 없네요… 이 세상에선…”


잠시 침묵.


그리고—


그가 한 발짝 물러섰다.


“여기 있어도 돼요.”


“대신—”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서로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민재는 수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순간—


그들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 사실은 곧

더 큰 진실로 이어졌다.


사람이 모이면
희망이 생기는 게 아니라—


갈등이 생긴다는 것.



지하 주차장의 어둠 속에서,

여섯 명의 생존자와
민재, 수진.


총 여덟 명.


작은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날 밤,

그들은 아직 몰랐다.


이들 중 누군가는
결코 아침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 제5장: 방사능 비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


지하 주차장의 공기는
차갑고, 무거웠다.


민재는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어깨의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괜찮아요…?”

옆에서 수진이 조용히 물었다.


“버틸 수는 있어요.”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픈 걸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밖에… 나가면 안 되는 거죠?”

다른 생존자 중 한 명이 물었다.


중년 남자였다.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이미 찢어지고 더러워져 있었다.


“지금은 위험합니다.”

조용히 말한 사람은
아까 그 남자였다.

이름은 현우.


“낙진이 아직 내려오고 있어요.”


“낙진…?”


“방사능 먼지입니다.”


그 단어 하나로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민재가 입을 열었다.


“얼마나 위험한 거죠?”


현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지금 밖에 나가면—”


“…천천히 죽습니다.”


그 말은 조용했지만,
그 어떤 비명보다 무서웠다.



그때—


톡.


톡… 톡…


모두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천장에서 물방울 같은 것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물이 아니었다.


“재…”


누군가 속삭였다.


회색의 가루.


그리고—


그 가루가 젖어 있었다.


“비야…”


하지만—

그건 평범한 비가 아니었다.


방사능 비.



“막아야 해!!”

민재가 외쳤다.


사람들이 급히 움직였다.


차 문을 뜯어내고,
천막처럼 막고,
옷가지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었다.


작은 틈 사이로
비는 계속 스며들었다.



“저거… 닿으면 어떻게 돼요…?”

젊은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현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사람이 말했다.


“죽는 거지 뭐…”


그 말은 너무 현실적이라서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렀다.


비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어… 어지러워…”


아까 그 정장 입은 남자였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괜찮으세요?!”


“속이… 울렁거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우욱—!”


그는 갑자기 구토를 했다.


피가 섞여 있었다.



순간,

모두가 뒤로 물러났다.



“설마…”


민재의 눈이 흔들렸다.


현우가 낮게 말했다.


“이미… 노출된 겁니다.”



정장 남자는 손을 떨며 말했다.


“살 수… 있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사람들을 향했다.


“나… 죽는 거야…?”


그 질문은—


누구에게 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던진 것이었다.



침묵.



그리고—


누군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또 다른 사람도.



그 순간—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다.


오염된 자와
아직 오염되지 않은 자.



“가까이 오지 마세요…”


누군가 말했다.


그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명확했다.



정장 남자의 얼굴이 무너졌다.


“나를… 버리는 거야…?”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다.



그 순간,

민재의 가슴이 조여왔다.


이건—


어제까지 우리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도덕도,
연민도,


모두—


생존 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정장 남자는 벽에 기대 앉았다.


혼자.


완전히 혼자.



비는 계속 내렸다.


지하 주차장의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피하며 앉아 있었다.



그날 밤,

그들은 깨달았다.


죽음은 더 이상
총이나 폭발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것.


천천히,
확실하게,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것.



그리고—


그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변해간다는 사실이었다.



민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는… 어디까지 떨어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제6장: 물의 전쟁


비는 밤새 내렸다.


그리고 아침—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지하 주차장 밖.


민재가 조심스럽게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멈춘 것 같아요.”


비는 그쳐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더 끔찍했다.


땅 위에는 회색 진흙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저게… 다 낙진이에요…”

현우가 낮게 말했다.


그 위를 걷는다는 건—


죽음을 밟는 것이었다.



“물이 필요해요.”


누군가 말했다.


그 한마디에
모든 시선이 모였다.



그건 사실이었다.


사람은 며칠은 버틸 수 있다.

하지만—


물이 없으면
끝이다.



민재가 가방을 열었다.


남아 있는 생수는—


세 병.


여덟 명.



“…나눠야죠.”

수진이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바로 동의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이미 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공평하게 나누면—”

현우가 계산하듯 말했다.


“하루도 못 버팁니다.”



“그럼 어떡하라고요?!”

젊은 여자가 소리쳤다.



“누군가는 덜 마셔야 합니다.”


그 말은—


곧 이것이었다.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때—


구석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물… 조금만…”


정장 남자였다.


얼굴은 더 창백해졌고,
입술은 말라 갈라져 있었다.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부탁이에요…”


그의 손이 떨렸다.



민재의 손도 떨렸다.


가방 속 물병을 바라봤다.


그리고—


꺼냈다.



그 순간—


“안 돼.”


현우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미 피폭됐어요.”


“물을 줘도—”


“…살릴 수 없습니다.”



민재의 눈이 흔들렸다.


“그래도…”



현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물은—”


“살 수 있는 사람을 위해 써야 합니다.”



그 말은 잔인했다.


하지만—


틀리지 않았다.



민재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 몇 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정장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 그냥 죽으라는 거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내놔!!”


갑자기 한 남자가 달려들었다.


물병을 향해.



민재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늦었다.


물병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쨍그랑—


뚜껑이 열리며 물이 쏟아졌다.



순간—


모든 사람이 움직였다.



손으로,
입으로,


바닥의 물을 긁어모았다.



“미쳤어?!”

“놔!!!”

“내 거야!!”



그건—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짐승.



민재는 얼어붙은 채 그 장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깨달았다.



문제는 물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사람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
그들은 규칙을 만들었다.


  1. 물은 공동 관리한다
  2. 하루 두 번, 최소량만 배급한다
  3. 어긴 자는—

“…쫓아낸다.”



그 규칙은
질서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폭력의 시작이었다.



민재는 벽에 기대 앉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수진이 조용히 물었다.


“…후회해요?”



민재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직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 말은
곧 바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건 시작일 뿐이었으니까.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엔진 소리.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차야…”


누군가 속삭였다.



그 순간—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했다.



물보다 더 중요한 것.



이동.



그리고—


그 차를 가진 사람이


적일지,
아니면—


새로운 희망일지.



아무도 몰랐다.

 

 

 

 

📖 제7장: 인간의 본성


엔진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드르르르—


그 소리는 이 폐허 속에서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살아 있는 문명의 소리.


모두가 숨을 죽였다.


민재는 손에 쥔 유리 조각을 더 꽉 움켜쥐었다.


“조용히…”

현우가 낮게 말했다.



차가 멈췄다.


지하 주차장 입구 바로 앞.


엔진이 꺼졌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


끼익—


발소리.


한 명이 아니었다.


여러 명.



“여기 확인해.”


낯선 남자의 목소리.


차분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안에 누가 있으면—”


“…살려두지 마.”



그 한마디로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민재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수진이 그의 옷을 꽉 잡았다.



“숨 죽여요…”


누군가 속삭였다.



발소리가 점점 안쪽으로 들어왔다.


빛이 흔들렸다.


손전등.



그 빛이 벽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멈췄다.



“여기 있네.”



도망칠 수 없었다.


숨을 곳도 없었다.



세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옷.


정돈된 장비.


그리고—


총.



“무기 내려놔.”


그들의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그건 명령이었다.


협상이 아니었다.



민재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 순간—


탕.


총성이 울렸다.



“아아악!!”


젊은 남자가 다리를 잡고 쓰러졌다.



“경고야.”


리더가 말했다.



“다음은 머리다.”



그 말은—


절대적인 진실이었다.



민재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유리 조각을 떨어뜨렸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



“좋아.”


리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말이 통하겠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생존자들이네.”



그 미소는 따뜻하지 않았다.



사냥꾼의 미소였다.




“물, 음식, 약.”


그가 말했다.



“다 내놔.”



이번에도 같은 상황.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그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다.



거부는—


죽음이었다.



민재는 가방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내밀었다.



리더가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안을 확인했다.



“이거면… 며칠은 버티겠네.”



그는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사라졌다.



“쓸모 있는 놈들만 데려간다.”



순간,

공기가 멈췄다.



“나머지는—”



그는 총을 들어 올렸다.



“…필요 없어.”



수진의 손이 더 세게 떨렸다.



민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선별.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



그 기준은—


그들 마음대로였다.



“너.”


리더가 민재를 가리켰다.



“체격 좋네. 따라와.”



그리고—


수진을 봤다.



“…저 여자는 버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안 됩니다.”


민재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리더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민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같이 갑니다.”



그 말은—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잠시 침묵.



그리고—


리더가 웃었다.



“재밌네.”



그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민재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럼—”



총구가 올라갔다.



“같이 죽든가.”




그 순간—


인간의 본성은
완전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
남을 버릴 것이고,


누군가는
끝까지 붙잡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앞으로의 모든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민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 제8장: 약탈자들


민재는 눈을 떴다.


총구는 여전히 그의 이마를 향하고 있었다.


차가운 금속.


죽음의 거리, 단 몇 센티미터.


“…같이 갑니다.”


그는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더 낮고, 더 단단하게.



리더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민재를 바라봤다.


마치—


어떤 물건의 가치를 평가하듯이.



그리고—


피식.


그가 웃었다.



“미친 놈이네.”



총구가 천천히 내려갔다.



“좋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데려가.”



그 순간—


민재의 다리가 풀릴 뻔했다.



살았다.


아직은.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나머지는 정리해.”



그 한마디.



“잠깐만요!!”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젊은 여자였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제발…”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뭐든 할게요… 제발…”



그 모습은 처절했다.



리더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탕.



총성이 울렸다.



여자는 그대로 쓰러졌다.



아무도 소리 지르지 못했다.



그 장면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쓸모 없는 건 필요 없어.”


리더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감정이 없었다.



그건—


이미 수없이 반복해온 행동이었다.




민재는 이를 악물었다.



분노가 올라왔다.


하지만—


표현할 수 없었다.



여기서 감정은


약점이었다.




“움직여.”



그들은 밖으로 끌려 나갔다.



세상은 더 끔찍해져 있었다.



도로는 갈라져 있었고,
차들은 녹아내린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체.



수없이 많은 시체.



그 위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남자들.



그들은 익숙해져 있었다.




차는 군용 트럭이었다.



뒤쪽에는 이미 몇 명이 타고 있었다.



모두—


지친 얼굴.


두려움에 굳은 눈.



민재와 수진도 밀려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쿵.



어둠.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수진이 속삭였다.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변을 살폈다.



한 남자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아주 작게 말했다.



“…여기서 나가야 해.”



민재의 눈이 흔들렸다.



“여긴… 사람이 사는 데가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여긴—”



잠시 망설이다가,


그는 말했다.



“농장이야.”



“…농장?”



민재가 되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키워.”



그 말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이해하게 될 것이다.




트럭이 멈췄다.



문이 열렸다.



눈부신 빛이 들어왔다.



“내려.”



그들은 하나씩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리고—


민재는 그걸 보았다.



높은 철조망.


감시탑.


무장한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수십 명.



모두—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삶이 아니었다.




“환영한다.”


리더가 말했다.



“여긴—”



그는 팔을 벌렸다.



“살아남은 자들의 세상이야.”



그 말은 틀렸다.



여긴—


살아남은 자들의 세상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를 이용하는 세상이었다.



민재의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그의 눈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알았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싸워야 한다.


 

 

 

 

 

📖 제9장: 붕괴된 도덕


철조망 안의 공기는
밖보다 더 숨 막혔다.


자유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재와 수진은 줄에 세워졌다.


사람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고개 들어.”


총을 든 남자가 말했다.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눈들.


모두 같았다.


비어 있었다.



“여긴 규칙이 있다.”


리더가 앞에 서서 말했다.



“일하면 산다.”


“쓸모 없으면 죽는다.”



단순했다.


너무 단순해서—


잔인했다.



“물은 하루 한 번.”

“음식도 마찬가지.”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버틸 수가…”



탕.



그 사람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바닥에 쓰러졌다.



“질문은 없다.”


리더가 말했다.



그 순간—


모두가 이해했다.



여기서 말은
권리가 아니었다.




작업이 시작되었다.



민재는 철조망 옆으로 끌려갔다.



“저거 치워.”



그가 가리킨 건—


시체였다.



이미 굳어버린.



민재의 손이 멈췄다.



“…왜… 안 치워?”



총구가 그의 옆구리를 눌렀다.



“일 안 하면—”



그는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민재는 천천히 몸을 굽혔다.



손이 시체에 닿았다.



차가웠다.



그리고—


무겁지 않았다.



그게 더 끔찍했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시체를 끌었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그 순간—


어떤 생각이 스쳤다.



“이게… 정상인가…?”



하지만—


곧 사라졌다.



여기서 정상이라는 건—


살아남는 것이었다.




수진은 물 배급 줄에 서 있었다.



작은 컵 하나.



그게 하루의 전부였다.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컵을 받았다.


그리고—


손이 떨렸다.



조금 흘렸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남자가 달려들었다.



“내놔!!!”



컵을 빼앗았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다.



“돌려줘!! 제발!!”



하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경비가 다가왔다.



그리고—


탕.



컵을 뺏긴 여자가 쓰러졌다.



남자는 물을 들고 있었다.



그는 얼어붙었다.



경비가 말했다.



“싸우면 둘 다 죽는다.”



그는 남자의 손에서 컵을 빼앗았다.


그리고—


바닥에 버렸다.



물은 흙 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시 줄 서.”




그 순간—


수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닦지 않았다.



여기서 눈물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밤.



민재와 수진은 구석에 앉아 있었다.



둘 다 말이 없었다.



오랫동안.



그리고—


민재가 입을 열었다.



“…오늘… 사람을 옮겼어요.”



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봤어요.”



다시 침묵.



“우리…”


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대로… 괜찮을까요…”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지 않다는 걸.



그리고—


더 무서운 건—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




그날 밤,

민재는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소리를 들었다.



작은 속삭임.



“도망쳐야 해…”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몇 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아직 눈이 죽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나가야 해…”



그 말은—


희망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더 큰 위험의 시작이었다.



민재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 제10장: 희망이라는 환상


밤은 깊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비명,
총성,
그리고 기억.


그것들이 계속해서 사람을 깨웠다.



민재는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지만,
정신은 깨어 있었다.



“…도망쳐야 해…”


그 속삭임이 다시 들렸다.



그는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세 명이 모여 있었다.



낮에 본 사람들이었다.



눈이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



민재는 천천히 다가갔다.



“계획이 있어요?”



세 사람 중 한 명이 고개를 들었다.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신이 있었다.



“내일 새벽.”



“교대 시간에 경비가 줄어듭니다.”



“그때—”



그는 손가락으로 철조망 쪽을 가리켰다.



“…뚫고 나갑니다.”




“가능해요?”



민재가 물었다.



잠시 침묵.



그리고—


“모르죠.”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이 흔들렸다.



“여기서 기다리면… 확실히 죽습니다.”




그 말은 맞았다.



이곳은—


천천히 죽는 곳이었다.




“같이 가요.”



민재가 말했다.



그 말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뜻이었다.




“저도…”


수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민재가 돌아봤다.



“괜찮아요?”



“…여기서 죽는 건… 싫어요…”



그녀의 눈은 떨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의지가 있었다.




그날 밤,

그들은 처음으로 “희망”을 공유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너무 연약했다.




새벽.



하늘은 아직 어두웠다.



경비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지금이다.”



그들이 움직였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철조망 쪽으로 다가갔다.



한 명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녹슨 철조각.



그걸로—


철조망을 비틀기 시작했다.



끼익…



작은 소리.



하지만—


그 순간,

모든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조용히…”



조금씩—


조금씩—


틈이 벌어졌다.



사람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



“먼저 가요.”



그 남자가 말했다.



민재는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갑니다.”




한 명씩.



천천히—


철조망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민재의 차례.



그가 몸을 밀어 넣었다.



철이 살을 긁었다.



아프지만—


상관없었다.



거의 다 나왔을 때—



“거기서 뭐 해?”



목소리.



모두가 얼어붙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경비.



총을 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


모든 희망이 무너졌다.



“도망이다!!”



경비가 외쳤다.



탕!



총성이 울렸다.



앞에 있던 사람이 쓰러졌다.



“뛰어!!!”



누군가 소리쳤다.



그 순간—


모두가 달리기 시작했다.



민재는 수진의 손을 잡았다.



“놓지 마요!!”



뒤에서 총성이 계속 울렸다.



탕! 탕! 탕!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는 넘어졌다.



하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철조망을 넘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자유.



하지만—


그건 진짜 자유가 아니었다.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폐허.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안전한 곳도 없는 세상.




수진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살았어요…?”



민재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탈출이 아니라—


더 큰 지옥으로 나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걸.




그 순간,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엔진 소리.



또 다른 무리.



민재의 눈이 굳었다.



그리고—


천천히 깨달았다.



“희망”은—


항상 구원이 아니었다.



때로는—


더 빠르게 죽게 만드는 유혹이었다.




그는 수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진짜 시작이에요.”

 

 

 

📖 제11장: 죽음보다 긴 하루


아침이 왔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아침”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태양은 떠 있었지만,
빛은 흐릿했다.


재와 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죽어가고 있었다.



민재와 수진은 멈춰 섰다.


더 이상 달릴 수 없었다.


숨이 찢어질 것 같았다.


“헉… 헉…”


수진이 무릎을 꿇었다.


“…더는… 못 가요…”



민재도 한계였다.


하지만—

멈추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조금만… 더 가요…”


그의 목소리도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뒤를 돌아봤다.


추격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무너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지붕이 반쯤 무너진 상태.


그래도—

햇빛을 조금은 가릴 수 있었다.



민재는 벽에 기대 앉았다.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물…”


수진이 작게 말했다.



민재는 가방을 열었다.



비어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수진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이제 눈물도 아까웠다.




시간이 흘렀다.



1시간.


2시간.



하지만—


그 시간은 너무 길었다.



배고픔보다 먼저 찾아온 건—


갈증.



입안이 말라붙었다.


혀가 입천장에 붙는 느낌.



“이러다… 죽어요…”


수진이 말했다.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일어섰다.



“찾아올게요.”



“혼자요?”



“…같이 가면 더 빨리 죽어요.”



그 말은 차갑게 들렸지만—


사실이었다.




민재는 밖으로 나갔다.



세상은 더 고요해져 있었다.



비명도,
총성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건—


사람이 줄어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는 걸었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다리가 무거웠다.



그리고—


시야가 흔들렸다.



탈수.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의식이 흐려지고,
결국 쓰러진다.




그때—


무언가가 보였다.



간판.



“약국”



민재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물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이미 부서져 있었다.



안은 엉망이었다.



약품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선반은 뒤집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민재는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물… 물…”



그의 손이 떨렸다.



그리고—


손에 잡힌 것.



생리식염수.



그는 멈췄다.



이건—


마실 수 있는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0.9% NaCl.



이론적으로—


마실 수 있다.



하지만—


완벽한 해결은 아니다.



그래도—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병을 뜯었다.


그리고—


마셨다.



짠맛.



하지만—


그건 생명의 맛이었다.




그는 몇 개를 더 챙겼다.



그리고—


멈췄다.



“이걸… 나눠야 하나…”



그 순간—


어떤 생각이 스쳤다.



“혼자 살 수도 있다.”



그 생각은 짧았지만—


강력했다.



수진 없이.


혼자.



짐도 줄고,
생존 확률도 올라간다.



그건—


완전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민재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수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괜찮아요…?”



그 목소리.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식염수 병을 더 챙겼다.



“…같이 산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 선택은—


그를 더 위험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를 인간으로 남게 할 것이다.




민재는 다시 걸었다.



그리고—


돌아갔다.



수진이 있는 곳으로.




그날,

그에게 주어진 하루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었다.




“죽음보다 긴 하루.”




그리고—


그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제12장: 아이들의 세계


민재는 거의 쓰러지듯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수진…”


목소리가 갈라졌다.



구석.


그녀가 있었다.


살아 있었다.



“…왔네요…”


수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민재는 아무 말 없이
식염수 병을 내밀었다.



“…이거…”


“마셔요.”



수진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병을 받아들었다.



한 모금.


그리고—


눈이 커졌다.



“…짠데요…”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살 수 있어요.”



그 말은 이상했지만—


틀리지 않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숨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때—


소리가 들렸다.



작은 발소리.



민재의 몸이 굳었다.



“…누구 있어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기척은 분명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잔해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아이.



열 살쯤.



그리고—


그 뒤에 또 한 명.



둘이 아니었다.



다섯 명.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민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



두려움은 있었지만—


어딘가 달랐다.



익숙해진 눈.




“…여기서 뭐 해?”



가장 큰 아이가 물었다.



그 목소리는 놀랍도록 침착했다.



민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살려고.”



그는 그렇게 대답했다.



아이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우리도야.”




그들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둘을 둘러싸듯 서 있었다.



경계.



아이들이—


어른을 경계하고 있었다.




수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희… 부모님은?”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아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대답은 짧았다.



“죽었어.”




그 말은 담담했지만—


너무 무거웠다.




“너희끼리… 있는 거야?”



“응.”



“얼마나…?”



“모르겠어.”



시간의 개념이 사라진 아이들.




그때—


한 아이가 민재의 가방을 바라봤다.



“…그거 뭐야?”



식염수 병.



민재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하나를 꺼냈다.



“마실래?”



아이들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바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독일 수도 있어.”



민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이들이—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 독이야.”



민재는 병을 열고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아이에게 내밀었다.



잠시.


아주 짧은 침묵.



그리고—


한 아이가 다가왔다.



병을 받아 들었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그리고—


눈이 커졌다.



“…짠데…”



다른 아이들이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랜만에 들리는
“아이의 웃음”이었다.




그 순간,

민재의 가슴이 조여왔다.



이 아이들은—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너희… 어떻게 살았어?”



민재가 물었다.



가장 큰 아이가 말했다.



“숨고.”


“도망치고.”


“훔치고.”



잠시 멈췄다.



그리고—


“같이 있어.”




그 말은 단순했지만—


완벽했다.




수진이 조용히 말했다.



“…같이 있을래?”



아이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눈빛으로 대화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왜?”



“어른은… 위험해.”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민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이들은 돌아섰다.



그리고—


사라졌다.



조용히.



마치—


이 세상의 일부처럼.




수진이 속삭였다.



“…우리가 더 무서운 존재네요…”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는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그날,

그들은 또 하나를 배웠다.



희망은—


어른에게서 사라졌지만,



아이들 안에는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희망조차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 제13장: 돌연변이


그날 밤—

공기는 이상했다.


차가운 것도, 따뜻한 것도 아닌—


어딘가 “썩은” 느낌.



민재는 잠에서 깼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들려요?”


수진의 목소리.



“뭐가요…?”



“…소리…”



민재는 숨을 죽였다.



그때—


들렸다.



긁는 소리.



사각—

사각—



무언가가 바닥을 긁고 있었다.



“…바람 아니에요…”


수진이 속삭였다.



민재는 천천히 일어섰다.



손에 잡히는 걸 찾았다.



부서진 철근.



그걸 꽉 쥐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사각—

사각—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거기 누구야!”


민재가 외쳤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그게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몸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형태가 이상했다.



팔이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등은 굽어 있었고,


피부는—


갈라져 있었다.



눈.



눈이—


없었다.



대신—


검은 구멍.




“뭐야… 저게…”


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존재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입을 벌렸다.



“아아아아—”



소리.



그건—


인간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 순간—


그게 달려들었다.



“피해!!”


민재가 외쳤다.



그는 몸을 틀었다.



손톱.



아니—


발톱 같은 것이 그의 옆을 스쳤다.



옷이 찢어졌다.



“젠장!!”



그는 철근을 휘둘렀다.



퍽!



명중.



하지만—


그건 멈추지 않았다.



다시—


달려들었다.



“죽어!!”



이번엔—


머리를 향해.



쾅!



철근이 머리를 강타했다.



그 존재가 비틀거렸다.



그리고—


쓰러졌다.




숨이 멎은 듯한 정적.



민재는 헐떡이며 뒤로 물러났다.



“…이게 뭐야…”



수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민재는 천천히 다가갔다.



그것을 바라봤다.



가까이서 보니—


더 끔찍했다.



피부는 썩어 있었고,


혈관이 검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입 안.



이빨이—


비정상적으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사람이야…?”



수진의 질문.



민재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건—


사람이었다.



한때는.




“방사능…”



현우의 말이 떠올랐다.



“노출되면… 천천히 죽는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어떤 경우에는—



죽지 않는다.



대신—


변한다.




그 순간—


멀리서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

사각—



그리고—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민재의 얼굴이 굳었다.



“…여기서 나가야 해.”



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그들은 움직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을.



하지만—


이미 늦었을지도 몰랐다.



그날,

그들은 깨달았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진짜 공포는 이제 시작이었다.

 

 

 

📖 제14장: 기억의 붕괴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어둠 속을 계속 걸었다.



숨이 차오르고,


다리는 이미 감각이 사라졌지만—


멈추는 순간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여기… 잠깐…”


수진이 벽에 기대며 말했다.



민재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너진 건물 안.



그들은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처음으로,


완전히 멈췄다.




정적.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아까… 그거…”


수진이 입을 열었다.



“…사람이었겠죠…?”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순간—


무언가가 확정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길 바랄게요…”



그녀의 말은—


희망이 아니라


기도였다.




시간이 흘렀다.



민재는 눈을 감았다.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고 싶었다.




그때—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햇빛.


밝은 하늘.



그리고—


사람들.



웃고 있었다.



“민재야!”



누군가 부르는 소리.



그는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



하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지…”



그 순간—


장면이 깨졌다.




민재는 눈을 떴다.



숨이 거칠었다.



“…왜…”



그는 이마를 짚었다.



기억이—


흐릿했다.




“괜찮아요?”


수진이 물었다.



“…방금… 누가 떠올랐는데…”



“누군지 기억이 안 나요…”




수진의 표정이 굳었다.



“…저도요…”



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뭐요?”



“…엄마 얼굴이… 생각이 안 나요…”



그 말은—


너무 조용했지만,


너무 무거웠다.




침묵.



그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같은 생각을 했다.



이건—


단순한 스트레스가 아니다.




“방사능…”



민재가 중얼거렸다.



“뇌에도 영향을…”



말을 끝내지 못했다.




수진이 벽을 잡았다.



“…이름은 기억나요…”



“내 이름…”



“…김수진…”



그녀는 반복했다.



마치—


잊어버릴까 봐.




민재도 따라 했다.



“…민재…”



“…나는 민재야…”



그는 중얼거렸다.




그날 이후,

그들은 깨달았다.



죽음은—


몸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기억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을.




시간이 더 흘렀다.



수진이 갑자기 말했다.



“…우리… 어디 가고 있었죠…?”



민재가 멈췄다.



“…도망…”



“…아니…”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도망치고 있었는지—


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그 공백.



그 짧은 공백이—


너무 무서웠다.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사각—



둘의 몸이 굳었다.



그 소리.



잊지 않았다.




민재는 수진의 손을 잡았다.



“기억해요.”



그는 말했다.



“우리는… 같이 살아야 해요.”




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직


무언가 남아 있었다.




그날,

그들은 또 하나를 잃었다.



완전한 기억.



그리고—


조금씩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었다.



진짜 질문은 이제 시작된다.



기억을 잃어도, 인간일 수 있는가?


 

 

📖 제15장: 인간인가, 짐승인가


어둠 속.


숨소리만 들렸다.



사각—


그 소리는 여전히 밖을 맴돌고 있었다.



민재와 수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순간—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분인지,
시간인지—


의미가 없었다.



그때—


수진이 갑자기 몸을 움찔했다.



“…왜 그래요?”


민재가 속삭였다.



“…배고파요…”



그 목소리는 이상했다.



단순한 배고픔이 아니었다.



더—


깊고,


거칠었다.



민재는 가방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진짜 문제가 시작된다는 걸.




“…괜찮아요…”


수진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이 달랐다.



어딘가 흐릿했고,


초점이 맞지 않았다.




“…수진 씨?”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민재를 바라봤다.



그 시선.



너무 낯설었다.




“……배고파요…”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더 또렷하게.




민재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


어떤 기억이 스쳤다.



그 괴물.



눈이 없던—


그 존재.




“…아니야…”


민재가 중얼거렸다.



“아직 아니야…”



그는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수진이 한 발짝 다가왔다.



민재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 작은 움직임.



하지만—


그건 결정적인 신호였다.




수진의 눈이 변했다.



“…왜…”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피해요…?”



그 말은—


아직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그녀가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



비명.



민재는 몸을 틀었다.



손톱이 그의 팔을 스쳤다.



피가 났다.



“수진 씨!! 정신 차려요!!”



그는 외쳤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다시—


달려들었다.



그건—


공격이었다.




민재는 밀쳐냈다.



수진이 바닥에 넘어졌다.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민재는 숨을 몰아쉬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때—


수진이 울기 시작했다.



“…왜 이래요… 나…”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인간이었다.




“나… 이상해요…”



“배고픈데…”



“…너무 이상해요…”




민재는 움직이지 못했다.



다가가야 할지,


도망쳐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사각—

사각—



그리고—


더 가까워졌다.




그 존재들.



여러 개.



민재의 얼굴이 굳었다.



“…시간 없어…”



그는 수진을 바라봤다.



눈물로 젖은 얼굴.



그리고—


그 안에 남아 있는


마지막 인간성.




선택.



지금—


결정해야 했다.




“일어나요.”



민재가 말했다.



“…같이 가요.”



수진의 눈이 흔들렸다.



“…나… 위험해요…”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민재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확고했다.



“같이 갑니다.”




그 순간—


수진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흘렀다.



“…왜요…”



민재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직 인간이니까요.”




그 말은—


논리가 아니었다.



선택이었다.




그들은 다시 움직였다.



밖에서는—


이미 그 존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날,

민재는 깨달았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상황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 선택이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제16장: 마지막 공동체


그들은 달렸다.


뒤에서는—


사각—

사각—


그 존재들의 움직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쪽으로!”


민재가 무너진 골목을 가리켰다.



수진은 거의 끌리듯 따라왔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때—


앞에서 소리가 들렸다.



“멈춰!!”



순간—


민재의 몸이 굳었다.



사람.



총을 든 사람.




“손 들어!”



다섯 명.



무장하고 있었다.



민재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수진도 따라 했다.




“뒤에 뭐야?”



그들 중 한 명이 물었다.



“…설명할 시간 없어요…”


민재가 말했다.



“도망쳐야 합니다.”



그 순간—


뒤에서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사각—

사각—



무장한 사람들의 표정이 변했다.



“…들어와.”



그들이 문을 열었다.



“빨리!”




민재와 수진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쿵.




안은—


의외로 정돈되어 있었다.



불빛.



사람들.



약 20명.




민재는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여긴…”



한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나이가 50대쯤.



눈빛이 단단했다.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리고—”



그는 주변을 가리켰다.



“…여긴 공동체다.”




그 단어.



공동체.



그건—


이미 사라진 줄 알았던 개념이었다.




“밖에… 괴물들이…”



민재가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우린 그걸 ‘변이체’라고 부른다.”



그는 너무 자연스럽게 말했다.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얼마나 있죠…?”



“…많다.”



그 짧은 대답이—


모든 걸 설명했다.




수진이 비틀거렸다.



그녀의 상태가 더 나빠지고 있었다.



“이쪽으로.”



한 여자가 다가왔다.



“눕혀.”



그녀는 수진을 데리고 갔다.



민재는 따라가려 했다.



“괜찮다.”



남자가 말했다.



“우린…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그 말에—


민재의 눈이 흔들렸다.



이곳은—


다르다.




하지만—


그는 곧 깨닫게 된다.



“다르다”는 것이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이름은?”



“…민재입니다.”



“나는 준호다.”



준호.



그는 이 공동체의 리더였다.




“여긴 규칙이 있다.”



그가 말했다.



“첫째,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둘째, 식량은 공동 분배다.”

“셋째—”



그는 잠시 멈췄다.



“규칙을 어기면… 추방이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 단어 하나가 걸렸다.



추방.



이 세상에서—


추방은 곧 죽음이다.




그때—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



민재가 돌아봤다.



수진을 보던 여자가 말했다.



“…피폭된 것 같아요.”



순간—


공기가 멈췄다.




“확실해?”



준호가 물었다.



“증상이…”



여자가 말을 잇지 못했다.




민재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공동체의 규칙.



“위험한 존재는…”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남길 수 없다.”




수진.



그녀가—


이 공동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민재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곳은 마지막 공동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인간은 시험받고 있었다.


 

 

 

 

📖 제17장: 새로운 질서


공기가 무거워졌다.


수진을 둘러싼 시선.


의심, 두려움, 그리고—


거리감.



민재는 그 사이에 서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선을 막고 있는 것처럼.



“결정해야 한다.”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있었다.



“이 공동체는… 감정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그 말은 맞았다.



여기까지 살아남은 이유.


그건—


냉정함이었다.




“시간을 주세요.”



민재가 말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확실하지 않잖아요.”



“아직은… 사람입니다.”



그 말은—


간절했다.




준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하루만 지켜본다.”



“그 사이에 변하면—”



그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날,

수진은 격리되었다.



작은 방.



창문도 거의 없는.



민재는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요?”



그가 물었다.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네…”



그 한마디에—


민재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아직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괜찮아요?”



“…모르겠어요…”



수진의 목소리는 약했다.



“배고픈데…”



“…무서워요…”




민재는 눈을 감았다.



이 감정.



익숙했다.



두려움.



그리고—


무력감.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준호였다.



“지켜보는 건 네 선택이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공동체는 한 사람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민재는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준비해라.”



준호가 말했다.



“결정은… 네가 하게 될 거다.”




그 말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밤.



공동체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건 평화가 아니었다.



긴장.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내일—


무언가 결정된다는 걸.




민재는 문 앞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지 않았다.



감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때—


안에서 소리가 났다.



“…민재…”



그는 몸을 일으켰다.



“네.”



“…나…”



잠시 침묵.



그리고—


“…기억이… 자꾸 사라져요…”



민재의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무슨 기억이요…”



“…아까… 말한 거…”



“…다시 생각하려니까…”



“…없어요…”




그건—


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래도 괜찮아요…”



수진이 말했다.



“…하나 기억나요…”



민재의 눈이 흔들렸다.



“…뭐요…”



잠시.


아주 짧은 침묵.



“…같이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 말.



그 한 문장.



그녀는—


거의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도



그것만은 붙잡고 있었다.




민재의 눈이 젖었다.



하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는 문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속삭였다.



“…지킬게요.”




그 약속은—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새벽.



해가 떠오르기 직전.



문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거친 숨.



그리고—


긁는 소리.




민재의 얼굴이 굳었다.



“…수진?”



대답은 없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문에 댔다.



그리고—


문을 열까, 말까.



그 선택 앞에 섰다.




이 문 하나가—


인간과 괴물을 나누는 경계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 제18장: 희생


문 앞.


민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문 너머에서는—


거친 숨소리.


긁는 소리.



그건 더 이상—


정상이 아니었다.



“…수진…”



그는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민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끼익—



어둠.



방 안은 빛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보였다.



수진.



그녀는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수진?”



민재가 한 걸음 다가갔다.



그 순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



초점이 없었다.



그리고—


입가에는 피.




“…아…”



그녀의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말이 아니었다.




민재의 심장이 무너졌다.



“…늦었구나…”



그는 알았다.



이건—


돌이킬 수 없다.




수진이 천천히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그리고—


민재를 향해 걸어왔다.




“…배고파…”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변해 있었다.




민재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칠 수 있었다.


싸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약속했잖아…”




수진이 가까워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리고—


손이 올라왔다.




그 순간—


민재가 움직였다.



철근.



그는 이미 들고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



쾅.




모든 것이 멈췄다.



수진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정적.



숨소리조차 사라졌다.




민재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 쥔 철근이—


떨어졌다.




“…미안해…”



그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지켜주지 못해서…”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수진을 안았다.



차가운 몸.



더 이상—


반응이 없었다.




그 순간—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끝났나…”



준호였다.



그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상황을 이해했다.




잠시 침묵.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판단이었다.




민재의 눈이 흔들렸다.



“…이게… 잘한 겁니까…”



준호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공동체를 살렸다.”




그 말은 맞았다.



하지만—


완전히 틀렸다.




민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수진을 더 꽉 안았다.




그날,

그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완전히 잃었다.




인간으로서의 일부.




그는 이제 알았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단순히 숨 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버릴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




밖에서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하루.



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 제19장: 불씨


아침이었다.


하지만—

민재에게 시간은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밤과 낮의 구분도,


살아 있음과 죽음의 경계도—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수진의 몸은
이미 떠나보내졌다.


공동체는 감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


그리고—


끝.



민재는 혼자 앉아 있었다.


벽에 기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건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공허함.



모든 것이 빠져나간 자리.




“먹어라.”



누군가 작은 그릇을 내려놓았다.



죽처럼 보이는 음식.



민재는 바라보기만 했다.



먹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안 먹으면 죽는다.”



그 목소리.


준호였다.



민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살아서 뭐 합니까…”



그 질문은—


비난이 아니었다.



진짜 질문이었다.




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조용히 앉았다.



민재 옆에.



“나는…”



그가 입을 열었다.



“…가족이 있었다.”



민재의 눈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아내, 아들, 딸.”



“모두… 그날 죽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감정이 없는 것처럼.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미—


너무 많이 느껴버려서,


더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나도 같이 죽으려고 했다.”




민재의 눈이 흔들렸다.



준호가 계속 말했다.



“근데…”



“살아 있더라.”




그 단순한 말.



하지만—


그 안에는 무게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유는 없어도…”



“…살 수는 있지 않나.”




민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모였다.”



“살고 싶은 놈들.”




준호는 주변을 가리켰다.



“이 공동체도…”



“…그렇게 시작된 거다.”




잠시 침묵.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없어도…”



“…살아가는 이유는 만들 수 있다.”




그 말은—


민재의 가슴 어딘가에 닿았다.



아주 약하게.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민재는 천천히 그릇을 들었다.



그리고—


한 숟갈.



입에 넣었다.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삼켰다.




그건—


단순한 행동이 아니었다.



선택이었다.



다시 살아가겠다는.




그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소란.



“문 열어!”



낯선 목소리.



민재와 준호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사람들이 모였다.



문 앞.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



남자.



피투성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살려… 줘…”



그는 무너졌다.




“…또 생존자야…”



누군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남자의 몸.



팔.



비정상적으로—


부어 있었다.



피부가—


검게 변하고 있었다.




민재의 눈이 굳었다.



이건—



수진과 같은 시작.




준호가 말했다.



“…격리해.”



사람들이 움직였다.



남자를 끌어갔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미—


힘이 없었다.




그 장면을 보며,

민재의 손이 다시 떨렸다.



기억.



수진.



그 마지막 순간.




그때—


그 남자의 손이 민재를 향해 뻗어졌다.



“살려… 줘…”



그 눈.



똑같았다.



수진과.




민재는 움직이지 못했다.



도와야 할까.



아니면—


끝내야 할까.




그 선택.



다시.



또다시—


그 앞에 놓였다.




그리고—


그의 안에서,

아주 작지만—


분명한 무언가가 살아 움직였다.



꺼지지 않은 것.



불씨.

 

 

 

 

📖 제20장: 다시, 인간으로


밤이 찾아왔다.


공동체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건 평화가 아니었다.


기다림이었다.



격리실.


그 안에는—


그 남자가 있었다.



숨이 거칠었다.



“하아… 하아…”



피부는 더 검게 변해가고 있었고,


손은—


비정상적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민재는 문 앞에 서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고.



눈앞에는—


두 개의 기억이 겹쳐져 있었다.



수진.


그리고—


지금 이 남자.




“…또 해야 하나…”



그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목소리.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준호였다.



“결정해라.”



그는 짧게 말했다.



“시간 없다.”




민재는 고개를 숙였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그는 문을 열었다.



끼익—



격리실 안.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살려줘…”



그 한마디.



그건—


분명 인간이었다.




민재는 천천히 다가갔다.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남자의 눈이 흔들렸다.



“…죽이려는 거야…?”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선택들.



살기 위해—


버린 것들.



수진.



그리고—


자신의 일부.




칼이 올라갔다.



손이 떨렸다.




그 순간—


남자가 말했다.



“…고마워…”



민재의 손이 멈췄다.



“…뭐요…”



“…이렇게라도…”



“…끝내줘서…”




그 말.



그건—


두려움이 아니었다.



부탁이었다.




민재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천천히.



칼을—


내렸다.




준호의 눈이 커졌다.



“뭐 하는 거냐—”



민재가 말했다.



“…아직입니다.”




그는 남자를 바라봤다.



“…아직 사람입니다.”




준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위험하다.”



“모두를 죽일 수도 있다.”




민재는 알고 있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지금 죽이면…”



“…우린 뭐가 됩니까…”




침묵.



모든 사람이 멈췄다.




민재는 계속 말했다.



“살기 위해…”



“계속 죽이다 보면…”



“…결국 우리도 같은 게 됩니다.”




그 말은—


논리가 아니었다.



선언이었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민재를 바라봤다.



오랫동안.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네 선택이다.”




그 말은—


허락이었다.



그리고—


책임이었다.




민재는 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남자의 옆에 앉았다.




“…같이 버텨봅시다.”



그는 말했다.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왜…”



민재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그게 인간이니까요.”




시간이 흘렀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그리고—


기적처럼—



남자는 변하지 않았다.



증상은 멈췄고,


숨은 안정되었다.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넘어갔다.




공동체의 사람들은
그를 바라봤다.



놀라움.


그리고—


어떤 감정.



잊고 있었던 것.




준호가 말했다.



“…가능한 건가…”



그의 목소리는—


처음으로 흔들렸다.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을 바라봤다.




잿빛이던 하늘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건—


거창한 희망이 아니었다.



세상이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작은 가능성.



그리고—


하나의 증명.




인간은 끝까지 인간일 수 있다는 것.




민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주 작게—


웃었다.




그날,

세상은 여전히 폐허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다시, 인간으로.



📘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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